[이담의 블렌딩 이야기] 바람이 살짝 기운다/나태주 블렌딩



바람이 살짝 기운다

이담의 블렌딩 이야기 / 나태주 블렌딩

작년 이맘 때까지는 커피 블렌딩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커피트럭으로 커피로드를 하면서 싱글커피를 로스팅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무래도 로스팅하는 환경이 일정하지 않았고, 생두의 재고를 많이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다. 몇 가지만 선택해서 로스팅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생두를 찾아서 로스팅을 했기 때문에 블렌딩을 한다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였다. 싱글 커피들의 맛을 제대로 끌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했다.
그렇다고 블렌딩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블렌딩을 통해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드는 것은 커피를 하는 사람으로서 큰 즐거움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커피로드 중 블렌딩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블렌딩의 즐거움에 빠지다
지금은 커피트럭에서 내려와 연남동에서 꾸준히 로스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블렌딩을 하나 둘 만들기 시작했다. 우연이지만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우연한 만남’은 하우스블렌딩으로 자리잡았고, 소설책인 ‘소설도쿄’를 모티브로 만든 도쿄 블렌딩을 시즌 블렌딩 커피로 지난 겨울 동안 선보이기도 했다. 연남동의 지역 특성인지는 모르겠지만 손님들이 의외로 블렌딩 커피를 많이 주문해서 꾸준히 새로운 블렌딩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커피 블렌딩은 두 가지 이상의 특성이 다른 커피를 섞어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단순한 설명이지만 실제로 블렌딩을 만들기 시작하면 까다롭고 복잡해진다. 일단 싱글 커피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맛과 향이 섞일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싱글 커피라고 하더라도 로스팅의 정도나 로스팅 날짜에 따라서 맛이 천차만별이고, 머리로 상상했던 맛이 실제 블렌딩을 하면 전혀 다른 맛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산수처럼 단순하게 1+1=2라도 되면 좋겠지만 1+1이 0.5가 되기도 하고 3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커피 블렌딩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아직 로스팅도 공부할 것이 많고 이제 블렌딩의 초보단계에 불과하지만 이렇게 블렌딩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하나의 과정을 공유하고 같이 이야기를 해보기 위함이다. 우선 내가 생각하는 블렌딩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주제와 목표가 필요하다.
커피 블렌딩은 단순히 맛있는 커피와 맛있는 커피를 섞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뚜렷한 주제와 목표가 있어야 원하는 블렌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맛있는 것들끼리 섞었을 때 오히려 이상한 맛의 커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마치 이 세상에 가장 예쁜 눈과 코와 입술을 골라서 얼굴 합성해서 만들면 오히려 이상한 얼굴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2. 구하기 쉬운 생두를 재료로 해야 한다.
어떤 맛을 구현하기 위해 구하기 힘든 커피 생두를 넣는다면 그 블렌딩을 계속 만들기 힘들다. 수입이 어려운 생두로 블렌딩을 만드는 것은 아주 특별한 한정판이 아닌 이상 가장 피해야 하는 블렌딩이다. 자주 로스팅을 해서 그 싱글의 맛을 잘 알고 이해하고 있을 때 블렌딩을 하기 쉽다. 

3. 비슷한 느낌의 커피끼리는 섞지 않지만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보통은 서로 다른 특성의 커피를 섞어야 밸런스가 좋은 블렌딩이 나오지만 어떤 의도가 있다면 비슷한 느낌의 커피를 섞는 것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블렌딩의 주제니까.

커피 블렌딩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맛있게 나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딱 기대한만큼 나오거나 더 못하게 나올 때가 훨씬 많다. 각각의 싱글 커피의 맛을 제대로 파악하고 최대한 맛있게 로스팅을 해서 준비하고, 그 맛을 바탕으로 서로 블렌딩을 하면 기대한 것만큼의 맛이 나와야 하는게 정상이겠지만 실제로는 기대한 것보다 맛이 없게 나오거나 상상도 하지 못한 맛이 나올때도 많으니 여전히 까다롭고 힘든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나태주 블렌딩을 만들어 보자
매달 블렌딩을 하나씩 만드는 것을 목표로 글을 쓰고 있는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다. 마침 이번 6월에는 온라인 교보문고와 함께 연남방앗간과 연희동의 연남장 등의 카페들이 참여하는 ‘책읽기 좋은 카페’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다. 각 카페마다 작가 한 명을 배정하고 각각의 카페에서 특별 메뉴를 제공하는 방식인데 우리 바람커피에서는 나태주 시인을 주제로 하기로 했다. 커피는 시와 잘 어울린다. 싱글커피를 매치시킬까 하다가 내친 김에 나태주 블렌드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나태주 시인은 ‘풀꽃시인’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을 만큼 자연친화적인 소재와 사랑과 이별, 인생에 대해 노래를 하는 시인이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으로 블렌딩을 할까 며칠동안 고민했고, 시집 <마음이 살짝 기운다> 중에서 제일 마음이 가는 시를 발견했다.

 
새로운 별
마음이 살짝 기운다
왜 그럴까?
모퉁이께로 신경이 뻗는다
왜 그럴까?
그 부분에 새로운 별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아니다. 저편 의자에
네가 살짝 와서 앉았기 때문이다
길고 치렁한 머리칼 검은 머리칼
다만 바람에 날려
네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쓰다듬었을 뿐인데 말이야.


이번 이벤트를 위한 시집 제목인 <마음이 살짝 기운다>도 이 시에서 따왔다. ‘다만 바람에 날려 네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쓰다듬었을 뿐’인 작은 흔들림이지만 그 파문은 크다. 그 부분에 마음이 기울고 새로운 별이 하나 생긴다.
나태주 블렌드를 한 모금 마셨을 때 작지만 점점 더 큰 파문이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풀같은 싱그러움이 느껴지고 꽃향도 살짝 올라오는 그런 커피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처럼 다 마시고 난 다음에도 잔향이 남아 있어서 고개를 돌려서 한참을 바라보는 그런 커피를 상상했다.

먼저 꽃향기가 필요하다. 지금 갖고 있는 원두 중에서 꽃향이 나는 것은 에티오피아의 내추럴 커피들이었다. 다행히 쓸 수 있는 내추럴 커피는 아리차, 모모라, 첼바 세 가지나 있었다. 이 중에서 조금은 진한 느낌의 모모라를 선택했다. 풀의 느낌은 무엇이 있을까? 에티오피아 하라 내추럴의 풋풋하면서도 진한 느낌이 떠올랐다. 일단 모모라와 하라의 조합을 테스트 해봤다. 둘 다 에티오피아의 내추럴이지만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다. 모모라는 꽃과 과일잼의 맛이 나는데 하라는 싱그러운 풀과 흙의 느낌이 난다. 이 둘의 조합은 기대한 것만큼 좋았다.
하지만 아직 약했다. 상큼하고 화려한 느낌은 있지만 시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이나 아련함은 빠져있다. 씁쓰름하면서도 입맛을 다시게 하는 감칠맛은 인도네시아 만델링에게 맡기기로 했다. 하지만 만델링은 숨김맛이어야 한다. 만델링이 튀어버리면 아쉬움이 없어져 버리니까.
1차로 에티오피아 모모라 1, 에티오피아 하라 내추럴 0.5, 인도네시아 만델링 0.5로 블렌딩을 해서 테스트를 했다. 향이 참 좋다. 풋풋한 풀냄새와 땅의 느낌도 난다. 하지만 여전히 만델링의 향취가 강력하다. 너무 씩씩한 커피다. 조용히 앉아서 사색을 해야 하는데 밖으로 뛰어다니고 싶은 맛이 난다. 게다가 하라가 생각보다 제 역할을 못해주고 있었다. 살짝 깔깔한 맛이 남았다. 좀 신경질적이랄까? 손을 들어 긴 머리칼을 쓰다듬어야 하는데 짧은 단발을 툭툭 털고 있는 느낌이다. 
만델링은 괜찮다. 비율을 조금만 더 줄여서 색깔을 조금 감추면 될 터다. 다시 고민에 빠졌다.




하라의 까칠함을 어떻게 해야 하나
며칠 후 불현듯 새로운 블렌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중남미 커피 중에서 좀더 달콤한 느낌의 커피를 하나 넣어주면 어떨까? 까칠한 느낌이 좀 줄어들 것 같았다. 일단 에티오피아 모모라 내추럴과 인도네시아 만델링은 그대로 갔다. 대신 만델링 비율은 아주 적게 넣고, 중남미쪽 커피는 볼리비아 까라나비로 정했다. 평소에 바람커피에서 ‘마음이 편한 커피’를 담당하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고소하면서 달콤하고 편안한 커피라 누구나 좋아하는 느낌이 있는데 블렌딩으로 들어갔을 때 기대했던 역할을 하기를 바라면서 비율을 결정했다.

 
모모라1 : 하라0.3 : 볼리비아0.3 : 만델링0.4

예상대로 첫번째 버전보다 훨씬 더 부드러우면서 편안하고 뒷맛이 좋은 블렌딩이 됐다. 이렇게 마무리를 할까 하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하라였다. 살짝 껄끄러운 맛을 주기는 했지만 풀의 느낌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마무리를 해도 됐지만 로스팅할 때의 고통이 떠올랐다. 지금 쓰고 있는 하라 내추럴은 G4 등급인데 로스팅할 때 사전 핸드픽도 해야 하지만 콩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로스팅후 핸드픽을 꽤 오랜시간을 해야 했다. 로스팅에 15분이 걸리면 후피킹에 15분이 걸려서 로스팅할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가끔 싱글을 위해 로스팅하는 것은 괜찮지만 블렌딩을 만들기 위해서는 계속 로스팅을 해야하는데 아무래도 피킹작업이 피곤했다. 그리고 살짝 껄끄러움이 남는 것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고민 끝에 하라는 빼기로 했다. 블렌딩은 심플할 수록 좋은데 4가지 블렌딩은 복잡하다. 로스팅도 번거로워지고 4가지 블렌딩보다는 3가지 블렌딩이 일관성을 유지하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남는 뒷맛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볼리비아가 의외로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하라를 빼도 빈 자리는 볼리비아가 채워줄 것이다. 비율을 달리하면서 테스트를 해보고 최종 블렌딩 비율을 정했다.

 
모모라1 : 볼리비아0.7 : 만델링0.3



이렇게 나태주 시인의 <마음이 살짝 기운다>를 모티브로 한 나태주 블렌딩을 완성했다. 커피 블렌드 이름은 ‘바람이 살짝 기운다’로 정했다. 이 커피는 처음 그라인딩을 하면서부터도 기분 좋은 향이 올라온다. 처음에는 무덤덤하게 들어오다가 식어가면서 모모라 내추럴의 꽃향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상큼한 산미를 즐길 수 있다. 고소하면서도 뒤를 받쳐주는 볼리비아, 그리고 살짝 숨김맛인 만델링의 뒷맛과 감칠맛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이 커피를 마신다면 어느 순간 슬쩍 스쳐가는 풀꽃의 향기에 아련한 옛 사랑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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