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Tea 낭만의 빠리



티마스터를 향한 도전 (9)

낭만의 빠리

Reporter 박은애(티 엘츠 대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언어 자체가 아름답고, 샹송이 주는 묘한 매력에 막연히 ‘낭만의 빠리’를 꿈꾸었던 적이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나는 마흔 살이 되어서야 프랑스의 티를 직접 느껴보고자 하는, 20대에는 상상도 못 한 확고한 목표 의식으로 그 꿈의 파리를 방문하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이런 게 인생이야’라고.
독일에서는 우리나라의 지방에서 ktx를 타고 서울을 가는 정도로 편리하게 기차를 이용하여 파리에 도착할 수 있다. 첫 파리 여행에서 내 머릿속에는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등의 역사적인 곳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장 먼저 가보고 싶었던 곳은 마리아쥬프레르였다. 번화하지 않은 골목에 위치했었던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그 매장의 외관은 화려하지 않았고, 다른 주변의 건물들과도 매우 조화로워 보였기 때문에 그곳을 찾을 때 약간 헤매기도 했다.
튀지 않는 모습의 외관을 지나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어서자 눈에 들어오는 특유의 마리아쥬프레르의 블랙틴케이스에 무게감 있는 옐로우 컬러로 조합된 고유의 색깔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적당한 넓이의 티를 즐길 수 있는 공간과 티를 구매할 수 있는 곳, 2층의 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부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한 흰 면모가 테이블에 깔려있고, 부드러운 컬러의 라탄의자, 스텝들의 클래식하면서도 복고적인 아이보리색의 린넨 슈트 등은 너무나 조화로웠다. 여러 유명티 하우스를 방문해 보았지만 그 우아하고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인상적이었다.
자리에 앉으면 숙련된 그곳의 직원이 티 리스트가 가득 적힌 메뉴북을 가져다준다. 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외국어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는 그 메뉴북은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는 내가 알고 있던 정보 혹은 상식을 모두 지워버리고 전문가인 그들의 추천을 받는 것을 선호한다. 현지 문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보리색의 슈트와 검은 피부색의 대비가 돋보였던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추천했다. 더불어 한국인들이 방문했을 때 한결같이 ‘마르코폴로’를 주문한다며 아쉬웠던 점을 함께 피력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 선택에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 말고 과감하게 새로운 것에 도전했을 때 더 큰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자신있게 말하고 싶다.
그는 ‘블랙오키드’라는 아로마화된 홍차를 추천해 주었는데, 나는 그 차를 마시는 순간 전율과 같은 행복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날 파리는 약간 쌀쌀하며 비가 내렸는데, 날씨가 주는 특별한 분위기와 그가 추천해준 홍차는 최고의 마리아쥬를 선사했다. 티소믈리에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보람있는 직업인지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이곳, 파리의 마리아쥬프레르는 티 산업의 정석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아쥬프레르에서 돋보이는 또 하나의 상품은 면 거즈로 둥글게 만든 모슬린 티백이다. 유일하게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며, 이런 독창적인 요소들이 모여 지금의 마리아쥬프레프가 높은 명성을 지니게 된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이지만 결코 과하지 않고, 우아하지만 엄격하지는 않은 느낌을 만들어낸 그들 브랜드의 부가가치는 깊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외에도 프랑스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티브랜드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가 아닐까? 쿠스미티, 포숑, 다만프레르 등도 유명세가 대단하다. 이들 프랑스티 브랜드는 전체적으로 아로마 홍차가 강세인 것 같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프랑스의 아로마 홍차는 독일에서 만들어져 공급되는 일이 많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 중에 자넷티가 있는데, 이것 또한 홍차의 품질이 뛰어나며, 가까운 일본에는 이미 진출해 있다.
쿠스미티는 다른 티상품 패키지와는 차별화되는 이국적인 러시안의 느낌이 있다. 티의 네이밍 또한 프린스 이고르, 아나스타샤 등 러시아 역사의 인물들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쿠스미티는 1867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티하우스로서 그 당시 러시아 황제의 공급업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귀족적인 차문화가 배척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창업자인 쿠스미초프는 1917년, 프랑스로 쿠스미티를 옮겨와 현재는 프랑스의 대표티 브랜드가 되었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왕가의 이야기를 다룬 고전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혁명군에 쫓겨 왕족 일가는 숨어지내며, 어떠한 희망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다가 결국 작은 방안에서 모두 몰살당한다. 아나스타샤는 니콜라이 2세의 네 번째 딸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쿠스미티의 아나스타샤는 항상 먹먹한 슬픔이 느껴진다. 차는 우리의 곁에서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억과도 함께 하는 것 같다.



샹젤리제 거리는 세계적인 브랜드의 매장들로 채워져 있으며, 그 대부분은 프랑스의 것들이다. 루이비통, 샤넬, 지방시 등뿐만 아니라 쿠스미티와 포숑 또한 이 화려한 거리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티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프랑스의 디저트이다. 프랑스 디저트의 자존심 라뒤레와 삐에르 에르메 매장도 꼭 거쳐가는 곳이다. 나는 두 곳 모두에서 마카롱을 맛보았는데, 식감과 당도에서 조금씩 차이가 났지만, 정말 최고의 맛이었다. 특히 라뒤레 매장의 마카롱을 사기 위한 줄이 어찌나 길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풍경이었다. 내 차례를 기다리며 구경하게 되는 수십 가지의 다양하고 완벽한 디저트 상자 패키지의 아름다움과 보석처럼 예뻐서 먹기도 아까울 같은 디저트의 모습에 반쯤 홀려있었다.
1년 내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기꺼이 적지 않은 돈을 파리에서 소비하고 돌아간다. 그 힘은 과연 무엇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생각해보건대, 과거의 훌륭한 유산을 잘 보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끊임없이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최고의 상품들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의 티는 차별화된 고급스러움으로 오히려 명품 패션브랜드들보다 더 많은 대중들이 소비하는 대표 상품이다.



마레지구의 광장에서 참 흥미로운 장면을 보았다. 많은 수의 젊은 프랑스인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모두 밝고 즐거워 보였다.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평화롭게 가두시위를 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평소 시위라고 하면 떠오르던 모습에 비해 싱거워 보일 정도였다. 파리 지하철의 고약한 냄새를 경험하게 되는 당혹스러움과 거리의 모든 곳이 박물관과도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이러한 모든 것이 공존하며 존중되고, 인정되는 환경은 프랑스의 힘이자 파리를 떠올리면 언제나 전 세계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생각난 김에 방부의 엔틱가게에서 샀던 프랑스 리모주 찻잔을 꺼내어 차 한잔을 해야겠다. 옛날 프랑스 찻잔은 키가 낮고, 폭이 적당히 넓으며 섬세하고 얇다. 특히 손잡이에 결코 손가락을 끼울 수 없기 때문에 오늘 나는 우아하게 찻잔을 살짝 잡고 마실 수밖에 없을 것 같다.